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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풀이의 넓고 앝은 대화 주제]

아시아의 오스카 쉰들러, 스기하라 지우네

by 디아크⌲ 2021.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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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개풀이입니다. 오늘은 처음으로 이 카테고리에 글을 써보네요. 오늘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인물은 스기하라 지우네 입니다.

유대인을 구한 일본인, 스기하라 지우네

흔히 유대인을 나치로부터 구한 사람 하면 떠오르는 사람은 오스카 쉰들러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너무 유명한 사람이죠. 영화로도 만들어졌으니까요. 그런데 의외로 일본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유대인을 구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 스기하라 지우네입니다.

스기하라-지우네-책상에-앉아서-책을-만지고-있는-사진
스기하라 지우네(1900-1986)

리투아니아의 일본 영사관의 인재

 1930년 말, 당시 일본은 나치와 전략적 관계를 맺기 전에 유대인 공동체에 재정적, 정치적으로 이익을 얻기 위해 유대인의 일본 입국을 쉽게 허용해주었습니다. 일본과 나치가 군사 동맹을 맺은 이후에도 일부 지역에서는 이런 방침이 여전히 유지되긴 했지만 상부에서는 허락하지 않던 시기였죠.

사무라이 가문 출신인 스기하라 지우네는 와세다 대학을 중퇴하고 제2차 세계 대전 중 리투아니아 일본 영사관의 총영사관으로 근무했습니다. 와세다대학을 다녔을 정도로 수제였고 당시 외교관으로 커리어를 탄탄하게 쌓아나가던 중이었죠. 무려 16년이나 국가를 위해 일하고 있었고 직업적인 목표가 높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마지막 희망, 스기하라 지우네

1940년 7월, 리투아니아 일본 영사관 문 밖에 200여 명의 유대인이 스기하라 지우네를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스기하라 지우네는 결코 유대인들의 구원자가 될만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비자발급을 받기 원하는 유대인의 요청에 많은 고민을 하던 스기하라 지우네. 그는 결국 불가능하다는 상부의 명령을 거부한 채 유대인들에게 필요한 비자 서류를 작성했습니다.

리우아나 영사관이 문을 닫기 직전까지 몇 주 동안이나 자신의 결정을 지키며 하루 종일 유대인의 비자서류를 작성하였습니다. 심지어 영사관이 폐쇄된 이후에는 호텔에 머물려 비자발급을 계속했습니다. 이 작업은 일본이 유대인과 스기하라는 떼어놓기 위한 열차가 도착하는 순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렇게 스기하라 지우네가 발급한 비자는 기록에 남은 것만 2,139장에 이르고 실제로 기록하지 못한 것까지 합하면 수천 장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가족 중 1명만 비자를 가지고 있어도 가족이 모두 일본으로 갈 수 있었으니 더 많은 사람이 스기하라 지우네를 통해 탈출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현재 일본에는 그렇게 탈출한 유대인의 수를 약 6,000명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유대인은 미국이나 일본의 고베시, 중국의 상해에 있는 유대인 공동체로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의 고베시로 도망친 유대인들 대부분은 지금까지도 일본에서 살고 있습니다.

산산조각 나 버린 커리어

상부의 명령을 거부한 채 비자를 발급한 대가는 아주 혹독했습니다. 총영사직에서 해임되고 리투아니아 외곽의 가장 낮은 직위로 좌천되었거든요. 후에는 외무성에 아예 퇴출까지 당했습니다. 이후 스기하라 지우네는 독일로부터 간첩으로 의심받아 게슈타포의 감시망에 시달려야 했고, 2차 세계 대전 말에는 소련군에 구속되어 고초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외무성에서 퇴출당할 당시에는 스기하라 지우네가 유대인으로부터 많은 돈을 받고 비자를 발급해줬다는 소문까지 돌아 그의 선행은 외면당하고 말았습니다. 실제로 스기하라 지우네 덕분에 목숨을 구한 유대인들이 그를 찾기 위해 일본에 문의했지만 '해당자 없음'이라는 답신만 받았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도 셋째 아들과 여동생을 잃는 등 많은 불행한 개인사를 겪었지만 무역과 번역으로 오랜 기간 활동했습니다.

드러나게 된 그의 업적

많은 유대인들이 스기하라 지우네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노력했지만 일본 정부의 외면으로 번번이 좌절되었습니다. 그런데 의외의 일로 그를 찾게 되는 게 스기하라가 자신이 구했던 유대인들의 이후 소식을 듣고 싶어 이스라엘 대사관에 자신의 주소를 남긴 덕분이었습니다.

스기하라 지우네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발급해준 생명의 비자로 탈출에 성공해 생존한 난민 소년 중 니슈리라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니슈리는 후에 일본 주재 이스라엘 대사관의 참사관이 되어 일본에 오자마자 스기하라를 찾아 재회하며 그의 선행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니슈리와 스기하라의 만남은 전 세계인을 감동시켰고 유대인 사회에서는 스기하라 지우네에 대한 감사와 명예회복을 위해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일본 내에서는 냉담한 반응과 악의로 가득한 중상모략만 이어졌죠. 다행히 여기에 끊임없이 반발하던 일본 주재 독일 기사였던 게르하르트 덤프만이 명령을 어기고 스기하라 지우네의 이야기를 세계 각국에 소개했습니다.

열방의 의인, 스기하라 지우네

게르하트르 덤프만의 기사 이후 1983년 일본의 후지 TV에서는 '운명을 나눈 1장의 비자'라는 제목으로 다큐멘터리가 나왔고 다시 스기하라 지우네가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1985년 이스라엘 정부는 그에게 야드바셈상과 열방의 의인이라는 칭호를 수여했습니다.(야드바셈상은 홀로코스트로 희생된 유대인을 추도하며 수여하는 상입니다.)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는 공적비까지 세줬죠. 하지만 지병으로 인해 스기하라는 지켜보지 못했고 다음 해인 1986년 86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습니다.

일본 정부가 스기하라 지우네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된 것은 이보다 훨씬 더 세월이 지나서인데 2000년 돼서야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고노 요헤이가 연설을 하면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외무성은 지금까지 고 스기하라 씨의 가족에 대한 무례함과 의사소통이 부족했던 점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일본 외교 책임자로서 외교 정책의 결정에 있어 인도적 고려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이라 느낀 바 있습니다. 고 스기하라 씨는 60년 전 나치의 유대인 박해라는 극한적 상황에서도 인도적이고 용기 있는 판단으로 외교관의 인도적 입장의 중요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이런 선배가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마치며

스기하라 지우네는 상명하복 문화인 사무라이 가문의 아들로서 자신의 인생을 한 순간에 바꿔버린 어떻게 보면 인생 최대의 실수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당연한 일을 했을 뿐" 이라며 담담히 말했습니다. 그 당연한 일 덕분에 많은 사람을 구한 스기하라 지우네는 지금까지도 영화로도 기억되고 그가 구했던 많은 이의 가슴속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 같습니다. 그럼 다음 포스팅 때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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